전광우 이사장 인터뷰 (2012.09.06)

작성자
세계경제연구원
작성일
2012-09-06 11:45
조회
539

이 남자의 대단한 이력서엔 ‘중학교’가 없다



서울대 경제학과·세계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국제금융센터원장·우리금융그룹 부회장·금융위원장…

A급 이력서를 지닌 것 같지만, 난 답안지 밀려 써 중학교도 낙방한 고입 검정고시 출신

중학교 낙방을 새 기회로 만들었던 것처럼,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

‘청춘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라는 詩句처럼…열정을 갖고 있는 나는 언제나 청춘


“그와 결혼한 것을 (내 인생) 최고의 축복이라 생각해요.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품격 있는 신사였어요. 늘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굉장히 배려하세요. 약점은 늘 덮어주시고, 강점은 늘 격려하십니다. 물론 이런 남편의 제일 큰 혜택을 받은 사람은 바로 저예요. 한국에서 심리학으로 학사와 석사를 했지만, 결혼 후 음악을 워낙 좋아해 미국에서 음악으로 학사, 석사, 박사를 모두 했어요. 그 배려는 평생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내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는 대한민국 남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존경은커녕 존중받기도 힘들어 하소연하는 주위 유부남들을 생각할 때 이 정도의 칭찬은 최고의 찬사나 다름없다.

조금은 닭살(?)처럼 느껴지는 멘트를 사정없이 날린 이는 바로 하정화(59) 박사이다. 그는 남편인 전광우(63)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을 ‘품격 있는 신사’로 소개하며, 무한한 애정을 표시했다. 남편의 사회적 지위를 감안해 듣기 좋게 포장한 말이 아니다. 이들 부부는 손을 꼭 잡고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지인들에게 목격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전 이사장은 외관상으로도 신사의 품격이 넘쳐난다. 훤칠한 키에 입가에 맴도는 은은한 미소, 중년의 여유와 멋이 느껴진다. 환갑을 갓 넘겼지만, 외모는 적어도 10년은 젊어 보인다. 특히 피부가 좋다는 것이 지인들의 공통된 평가. 세월이 전 이사장만 비켜간 느낌까지 든다.

이런 외모 탓에 그의 인생은 매우 모범적이며, 굴곡이나 시련이 없었을 것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싸이(PSY)의 강남스타일을 필두로 B급 문화가 인기를 끄는 요즘 세태로 치자면, 그는 조금 지루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실제로 네이버 등에 공개되는 이력서 어느 곳에서도 시련의 그림자는 찾기 힘들다. 서울대를 나와 외국에서 공부했고 현지에서 교수로도 생활했으며, 세계은행에서 수석이코노미스트로 평생 직업을 보장받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1남 2녀의 자녀를 뒀고 부인도 박사이다.


오랜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국제금융센터 원장, 우리금융그룹 부회장, 포스코 이사회 의장, 금융위원회 위원장 등 한 번도 거치기 어려운 자리를 돌아가면서 맡았다. 누가 봐도 A급인 셈이다.

이런 그의 이력서도 잘 살펴보면 몇 가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정확하게 말해 몇 가지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일례로 그는 서울 혜화초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서울사대부고를 입학했다. 중학교 시절이 그에게는 없는 셈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중학교 낙방과 최연소 고등학생

시계바늘을 50년 뒤로 돌렸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경기중학교에 낙방했었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한 과목의 답안을 밀려썼기 때문이다. 재수라도 했을 법한데,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바로 고입 검정고시를 본 것. 그리고 전국 최연소 고등학생이 됐다. 태어나서 처음 맛본 시련이 그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된 셈이다.

“가까운 친구들은 경기중학교에 많이 들어갔고, 난 떨어졌어요. 욱하는 기분에 재수할 것이 아니라 검정고시를 보기로 했지요.”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중학교에 낙방한 후 그는 6개월 동안 서울 인사동에 있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다. 한겨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공부해 고입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서울사대부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 13세였다. 최연소 고등학생으로 알려지면서 그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또래에 검정고시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중학교에 낙방해 검정고시로 최연소 고등학생이 됐다는 스토리가 재미있었나 봐요. TV에 인터뷰도 했고, 신문에도 많이 나왔어요.” 이 사건을 계기로 멀쩡하게 학교 다닐 수 있는 학생도 검정고시를 보는 바람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오기가 발동돼 시작한 검정고시 공부는 그만큼의 대가를 요구했다. 전 이사장은 최연소 고등학생이 됐지만, 검정고시 준비로 건강이 나빠지며 6년 동안이나 고등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는 최연소 고등학생 기록과 함께 서울사대부고 역사상 가장 오래 고등학교를 다닌 학생으로 남게 됐다.

최연소 고등학생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그에게 따라붙은 것은 다름 아닌 기흉(氣胸)이었다. 폐에 구멍이 뚫려 공기가 새는 증상으로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병이다. 휴학을 밥 먹듯이 해야 했고, 안정을 취하기 위해 낚시터를 전전해야 했다. “(기흉을) 치료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안정이에요. 때문에 낚시터에 많이 갔지요. 용인 밑에 신갈 저수지도 가고 충청도에 위치한 저수지에 가기도 했어요. 본의 아니게 젊은 강태공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어요.”

당시 그는 어머니가 세상을 뜨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은 고속도로를 타고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고속도로 중간중간에 휴게소도 많이 들렀고, IC에서 빠져 나와 국도나 시골길을 돌고 돌면서 살아온 것 같아요. 만약 고속도로만 달렸다면, 시골의 아름다운 풍경도 제대로 못 봤을 것이고, 다양한 인생의 맛도 못 봤을 거예요.”


#예일대를 유학한 큰아버지, 초등학교만 나온 아버지

전 이사장은 지금은 건강한 편이지만, 어렸을 때에는 약골이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안 좋았어요. 대학 들어갈 때까지도 계속 약골이었지요. 병치레를 많이 한 편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직접 주사기를 삶아 소독하고 엉덩이에 영양제를 놓아주기도 했어요.”

몸은 약했지만, 그의 꿈은 튼튼했다. 프린스턴과 예일대학에서 유학한 큰아버지의 이야기를 종종 들으면서 외교관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의 큰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공보처 장관을 지내기도 한 전성천 박사이다.

“외국에서 공부해 외교관도 되고, 어머님께 뾰족구두도 사드려 기쁘시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하셨던 아버지를 보며 내가 대신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예일대를 나온 큰아버지와 달리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에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조부모는 경북 예천에서 농사를 짓고 사셨어요. 큰아버님은 일찍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유학을 갔지만, 우리 아버님은 집안을 챙겨야 했어요. 일찍 고향을 떠나 사업을 했고 형제, 부모 모두를 서포트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사연은 부모의 높은 교육열로 이어졌고 어린 그에게도 공부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줬다. 특히 어머니의 교육열은 대단했다고 한다. “교육열이 높으셨지요. 특히 막내인 저에 대한 열정이 많았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 담임선생님 집에서 하숙을 시킬 정도였으니깐요. 그래서 중학교에 떨어진 것이 더욱 충격이었지요. 부모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마음의 충격이 컸던 것 같아요.”

어린 그에게 처음 찾아온 시련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은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법을 알려줬다. “이때 경험이 결과적으로 삶의 자산이 된 것 같아요. 위기 앞에서 자신감을 잃지 않고 도전과 용기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가 2008년부터 2009년까지 금융위원장을 지내며 글로벌 금융위기를 조기 극복할 수 있게 한 것도 결국 이런 어릴 적 특별한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중학교를 낙방하면서 겪은 일은 그가 앞으로 맡을 일들에 대한 복선이기도 했던 셈이다. “요즘도 어떤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이번엔 또 어떤 기회가 오려고 이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경제학에서 경영학으로 전공을 바꾸다

그의 이력서에는 특이한 부분이 하나 더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경제학 석사를 전공했다. 그런데 박사학위는 경영학으로 받았다. 전공을 바꿔 박사학위를 받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어릴적 꿈은 외교관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현실에 눈을 떴고 미래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그가 서울대 경제학과를 택한 것은 중소사업을 해온 아버지를 보면서 경제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국가에 대한 생각도 그를 경제학으로 이끌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가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성장 노력을 하고 있었어요. 좀 더 잘사는 나라가 되는 데 보탬이 되는 분야를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경제학 공부는 미국에서 석사를 받는 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곧 경영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유학 때 경영학으로 전공을 바꿨지요. 경제는 추상적이라는 생각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일을 다루는 것이 더 의미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전공을 경영학으로 바꿨음에도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녔을 정도로 공부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인디애나대학에서 자교 졸업생 동양인 중에 최초로 교수에 임용되기도 했다.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경험을 더 쌓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잡았다. “미시간 주립대학에 있는 동안 세계은행에서 오퍼가 왔어요. 평생 고용이 보장되는 자리였지요. 이것이 미국에서 오래 체류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그렇게 23년을 미국에서 보냈다. 외국에서의 생활은 그의 태도와 품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창조적 리더가 없잖아요. 미국에는 ‘차고문화’라는 것이 있어요. 이들에게 차고는 유년시절 주요 학습장이기도 하지요. 새로운 것을 만드는 노력과 실패의 연속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실험정신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장소로서 차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창의력과 함께 절제된 품격도 몸에 배었다. “젊은이들도 절제와 배려가 있는 품격을 지향해야 합니다. 품격 없는 열정은 값싼 열정에 불과하지요. 선진국일수록 ‘고맙다’ ‘미안하다’와 같은 남을 배려하는 표현이 많아요. 서로를 존중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문화가 정착된 국가의 국민은 품위가 뒤따릅니다.”

서울 잠실 국민연금공단 7층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는 ‘겸즉진(謙卽進)’ ‘인위고(忍爲高)’라는 글귀가 걸려 있다. 겸손한 자가 나아가고, 인내하는 자가 높임을 받는다는 뜻이다. 공자의 글귀로 25년 전 첫 중국 출장에서 가져온 후 오랫동안 그를 따라 사무실을 옮겨 다녔다.


#한국으로 돌아올 운명

그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나라는 IMF 외환위기로 외부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세계은행에서 국제금융팀장 겸 수석이코노미스트로 활동하면서 쌓은 그의 채무조정 경험도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 정부는 세계은행에 지원을 요청했고 전 이사장이 2년 동안 세계은행에서 파견 나가는 형식으로 국내에 들어오게 된다. “97년 외환위기가 없었으면, 아직도 내가 워싱턴에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전 이사장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맡았던 일은 경제부총리 특별 보좌관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장관 수명과 함께 하는 일반적인 자문관과 달랐다. 장관이 바뀌어도 계속 일했다. “정부 초청으로 세계은행에서 파견 나오다 보니 정부가 바뀌더라도 계속 일했어요. 이규성 장관, 강봉균 장관, 이헌재 장관, 진념 장관 시절에도 일했지요. 4명의 장관과 인연을 맺었는데, 모두 좋은 인연이었어요.”

이헌재 장관 시절에는 국제금융센터원장도 겸하게 된다. 업무가 늘었지만, 그는 임금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은행 소속이었어요. 98년 10월에 나왔기 때문에 2000년 10월까지 세계은행에서 임금을 받았어요. 달러로 받았는데, 결국 외화벌이를 하게 된 셈입니다.”

이렇게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여러가지 기록적인 일을 하게 된다. 국내 최초 금융지주회사인 우리금융지주 총괄 부회장 역할을 담당했으며, 국내 최초 민간 출신 국제금융대사가 된다. 또 금융위원장으로 국내 최초 민간 출신 금융부처 수장에 오르며 화려한 조명을 받았으며, 3년 전에 금융수장 출신 최초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됐다.

어릴 적 중학교 낙방을 새로운 기회로 만든 그는 거듭해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모습을 보였다. 세계은행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고, 2008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도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국발 금융위기를 조기 극복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리고 2009년 취임할 당시 200조원대에 그쳤던 국민연금기금 규모도 3년 만에 380조원을 넘어서며 세계 3위 연기금 규모를 넘보게 됐다.

되돌아 보면 모든 것이 운명이었다. 중학교에 낙방한 것도 운명이었듯이 세계은행에 들어간 것도 운명이었다. 운명처럼 국내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죽을 때까지 생산재로 살고 싶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슈퍼 얼리버드(Super Early Bird)이다. 평소 그의 기상 시간은 오전 4시. 출근 시간이 오전 7시30분 정도이니 기상하고 나서 한참을 지나 회사로 나오는 셈이다. 그러는 동안 그가 하는 일은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일이다. 외신을 챙기고 세계 금융시장의 흐름을 파악한다. “아침은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에요. 주변도 조용하고 정신도 맑아 생각을 정리하기 좋습니다.”

오전 4시에 기상하는 습관은 종교적인 이유도 있지만, 일상이 그렇게 만든 측면도 있다. 미국에서 생활할 때는 어린 아이를 돌보느라 밤에 자주 깨는 습관이 생겼고 국내에 돌아와서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글로벌 금융시장을 꼬박꼬박 챙겨야 했다. 국제금융센터에서는 오전 5시30분에 출근해 업무를 보고 직원들과 아침을 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후 금융위원장 시절에는 오전 2, 3시에 일어나 외국 증시 마감에 맞춰 세계 금융시장을 모니터링해야 했다. “그러다보니깐 (새벽 기상이) 패턴이 돼 버렸어요. 세계은행에 있을 때는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해 오전 6, 7시에 사무실에 도착해야 했지요.” 평생을 슈퍼 얼리버드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슈퍼 얼리버드의 DNA에 대해 물었다. “내가 좋아하는 시는 사무엘 울만의 청춘(Youth)이라는 시입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는 대목이 좋아요. 열정을 갖고 있는 한 젊다는 뜻이지요.” 세상에 대한 열정이 그의 이른 새벽을 깨우고 있었다.

여전히 열정적인 그가 향후에 어떤 생활을 그리고 있는지 자못 궁금해졌다. “예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나의 가정이나 우리 사회, 국가, 그리고 나아가 전 세계도 되겠지만, 나 자신의 한계효용이 플러스로 남아있을 때까지 살다 죽으면 좋겠어요. 죽을 때까지 생산재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글=박도제 기자/pdj24@heraldcorp.com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헤럴드경제 2012.09.06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