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우 칼럼] 고령화와 저금리 덫에 걸린 국민연금 (조선일보 201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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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연구원
작성일
2016-09-21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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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

[朝鮮칼럼 The Column] 고령화와 저금리 덫에 걸린 국민연금

입력 : 2016.09.21 05:52 | 수정 : 2016.09.21 05:55


전광우 연세대 석좌교수·前 금융위원장



노령연금의 역사는 19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국강병책으로 독일을 통일하고 독일 제국의 초대 총리에 오른 철혈(鐵血)재상 비스마르크가 주인공이다. 그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추스르기 위해 의료·노령·장애 등 사회보험을 도입했다. 평균수명이 50세도 안 되던 당시,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이 65세로 정해져 국민 대부분은 연금 받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뛰어난 정치가인 비스마르크가 그때로선 정치적으로 한 건 했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남는 장사를 한 셈이다. 상황은 21세기 들어 급반전됐다. 빠른 고령화와 낮은 출산율은 연금 재정을 악화시키고 초(超)저금리 추세는 기금 수익을 떨어뜨리면서 연금제도의 안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고령화는 국내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충격을 예고하는 시한폭탄이다. OECD 회원국 중 최악 수준의 노인 빈곤율이 보여주듯 노후 준비가 턱없이 부족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급속한 고령화는 축복이라기보다 재앙에 가깝다. 지난 20년간 한국인 평균수명은 10년이나 늘었고 올해를 정점으로 내년부터 생산 가능 인구(15~64세)는 감소세로 돌아선다. 생명공학과 인공지능(AI) 등 제4차 산업혁명의 접목으로 수명이 획기적으로 연장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반겨야 할 100세 시대에 비상이 걸린 곳은 국민연금이다.


/조선일보 DB


연금 위기 근본적 해결하려면
OECD 평균 절반 수준인
국민연금 보험료 현실화해야
신중하되 적극적인 투자 마인드로
불확실해도 고수익 추구하는 것이
주인인 국민 위한 대리인의 책무




국민연금은 고령화·저출산·저금리의 삼중고(三重苦)를 겪고 있다. 연금 불안을 극복하려면 제도 개혁이 우선이지만 기금 운용 혁신 또한 중요하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는 채권 투자 비중이 큰 연기금의 수익이 추락하는 '채권 쇼크' 여파로 '연금 위기'의 글로벌 확산을 경고하고 나섰다. 안전자산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우량 채권이 항상 좋은 건 아니라는 얘기다. 내일로 예정된 미국 연준(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기준금리 결정은 현재로선 동결에 무게가 실리는 가운데 연내 인상되더라도 세계적 저금리 기조는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저금리는 경제 활성화에 일조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부동산 버블을 키우는가 하면 연기금에 직격탄을 날리기도 한다. 국민연금의 경우, 총자산의 60%를 채권에 투자하고 있어 낮은 금리의 큰 피해자다. 1987년 설립 이후 연평균 6%대 수익을 기록한 국민연금 작년도 수익률은 4.5%에 그쳤다. 그나마 두 자릿수 수익률의 대박을 낸 해외 인프라 등 대체 투자 덕분에 주요 연기금에 비해 선방한 셈이지만, 연간 수익률이 1%포인트 줄어들면 국민연금 기금 고갈 시기는 5년 앞당겨진다. 작년 말 기준 국민연금 적립금 512조원의 45%에 달하는 234조원이 누적 수익이란 사실은 수익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운다.


국민연금의 예상 수익률과 실제 수익률. /조선일보 DB



자산 규모 1500조원이 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연기금인 일본 공적연금(GPIF)의 실패 사례가 우리에게 좋은 반면교사다. GPIF의 기금 경쟁력이 바닥으로 떨어진 이유로 과거 정부 재정 적자 보전을 위해 초저금리 국채를 무리해 인수한 것과 근년 들어 아베노믹스 정책 지원에 동원하면서 손실이 늘어난 점이 꼽힌다. 일본 경험의 교훈은 어떤 형태든 공적 기금의 정치적·정책적 수단화를 피하고 기금 운용의 전문성·책임성은 키우라는 뜻이다. 긴 안목으로 연기금의 국내외 투자 다변화 노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라는 메시지다.

국민연금과 같이 '주인 있는 돈'을 관리하는 대리인에게 필요한 소양은 '청지기 정신'(Stewardship)이다. 소극적 투자가 안정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말처럼, 상황 변화에 선제적·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리스크를 줄이는 길이다. 확실한 저수익보다 불확실해도 더 높은 평균 수익을 추구하는 것이 주인을 위한 대리인의 책무이고 장기적 관점에서 바람직하다. 신중하되 적극적인 투자 마인드를 키워야 안정성과 수익성의 조화라는 기금 운용 원칙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 소극적 투자 문화를 탈피하려면 정치적 간섭과 중복적 감사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 기금 본부의 내년도 지방 이전을 앞두고 인재 유출 우려가 커지는 현시점에서 다음 주 시작되는 20대 국회 첫 국정감사부터 변화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연금 위기의 근본적인 해결은 제도 개혁에 달렸다.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인 국민연금 보험료를 현실화하고 소득재분배 효과를 개선하는 등 핵심 과제를 조속히 실천에 옮겨야 한다. 저금리 충격을 극복하고 연금 재정 안정에 기여하도록 기금 운용 역량 강화를 위한 특단의 대책도 시급하다. 연기금 혁신은 국내 금융 서비스산업 경쟁력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세계 최초로 연금제도를 도입한 비스마르크가 남긴 "기회는 위기 속에 있다"는 말이 새삼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조선일보 201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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