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우 칼럼] 경제위기 최악의 대응은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조선일보 201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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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연구원
작성일
2016-05-16 16:06
조회
26

[朝鮮칼럼 The Column] 경제위기 최악의 대응은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입력 : 2016.05.16 11:13



전광우 연세대 석좌교수·前 금융위원장



제4차 산업혁명을 견인하는 인공지능이 향후 의사, 변호사, 재무 설계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군을 대체하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그런 가운데 인공지능이 가장 대체하기 어려운 분야가 '한국 정치판'이라는 웃지 못할 얘기가 있다. 국내 정치와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유난히 낮은 점을 꼬집었다. 지난 총선에서 여당 공약으로 선보인 후 정치적 화두와 사회적 관심사가 된 '한국판 양적 완화'가 좋은 예다. 논란만 무성하고 해법은 불확실해 앞으로의 향방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양적 완화는 넓은 의미로 전통적 수단을 넘어서는 중앙은행의 확장적 통화정책을 일컫는다. 일본이 오랜 경기 침체 타개를 위해 2001년 시도한 바 있지만, '현대판 양적 완화'의 원조(元祖)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지낸 벤 버냉키다. 2008년 4월 워싱턴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공황 극복 과정에서 남긴 가장 위대한 공적은 국가 경제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용기였다"라는 인상적인 말을 했다. 작년 서울에서 다시 만난 버냉키 의장은 금융 위기 극복을 위한 미국의 과감한 통화정책은 그가 쓴 저서의 제목처럼 '행동하는 용기(The Courage to Act)'의 표출이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이미지 크게보기미 연준의 양적 완화 정책 /조선일보 DB


국내 양적 완화 논쟁이 던지는
근본적인 메시지는
한국은행의 위상 강화

저성장이 고착하는 시대에
경제 운영 助役에서 벗어나
주역에 걸맞은 리더십 갖춰야




한국판 양적 완화는 취약 산업의 구조조정 촉진을 위한 국책은행 자본 확충에 한은이 참여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찬반 양쪽 다 일리 있는 이유를 내세운다. 그러나 구조조정의 시급성에는 이견이 없고 양적 완화의 내용과 범위도 진화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은의 지원 방법에 대한 소모적 논쟁은 접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 금융위원회가 추진한 은행자본확충펀드에 한은이 동참하는 데 무려 반년이나 걸렸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제 활성화 대책은 정부가 돈을 푸는 재정정책과 중앙은행이 돈을 찍는 통화정책이 양대 축이다. 지난 금융 위기 이후 미국, 유럽, 일본 등 대부분 선진국과 상당수 신흥국에서조차 국가 부채 증가로 재정정책의 여력이 줄어들면서 양적 완화는 경기 회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되었다. 모든 정책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고 경기 부양책에 '공짜 점심'은 없다. 양적 완화도 예외가 아니다. 만병통치약이 아니지만 금기 약물 또한 아니다. 잘 쓰면 약(藥), 잘못 쓰면 독(毒)이다. 발권력 활용은 악성 인플레 우려와 정치적 악용을 차단한다면 가계, 기업, 정부의 부채 부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양적 완화의 성패는 경제 체질 개선과 체력 강화를 위한 구조조정과 구조 개혁의 수행 여부에 달려 있다. 미국은 자동차산업 등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성공한 사례지만 유럽과 일본은 그렇지 못한 경우다.


이미지 크게보기2015년 2월 5일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해 의원들 질의에 답하고 있다. 최 부총리는“한국 경제가 일본의‘잃어버린 20년’을 상당 부분 답습하고 있다”면서도“우리경제가 올해 3.8% 성장이 가능하고 현재는 디플레이션은 아니다”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우리나라의 재정 건전성은 OECD 국가 중 비교적 양호하지만 국가 부채가 빠른 증가세에 있고 향후 재정 지출 수요도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그 때문에 재정과 통화정책 간의 조화와 균형이 필수 과제다. 정부는 청년 실업 및 양극화 해소와 저출산 고령화 문제 극복, 구조조정 관련 사회 안전망 확대 등에 집중하고, 한은은 금융권 자본 확충에 핵심 역할을 맡는 것이 합리적 조합일 수 있다. 국내 양적 완화 논쟁이 던지는 근본적인 메시지는 한은의 위상 강화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한은이 오히려 더 정치적이란 오해도 불식해야 한다. 저성장이 고착화하는 시대에 중앙은행은 국가 경제 운영의 조역(助役)이었던 과거 프레임에서 벗어나 이제는 주역(主役)에 걸맞은 실천적 리더십을 갖춰야 한다.

한국 경제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아간다는 경고음이 울린 지 오래다. 우리가 장기 침체에 빠져들면 그 파장은 일본이 겪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할 것이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선진국 진입 후에 겪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해외 자산을 보유한 부자 나라이고 막강한 기초과학 경쟁력을 가진 선진국이다. 부자는 망해도 3대가 먹을 게 있다지만, 선진국 문턱에 들어가지도 못한 우리가 20년을 잃어버린다면 중진국의 덫에 걸려 '한 방에 훅' 갈지 모른다.

역동적 기업가 정신은 기업에만 필요한 덕목이 아니다. 정치·경제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오늘날 정치권과 정부, 중앙은행 모두 적극적 도전정신으로 힘을 모아야 나라 경제를 살리고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 "경제 위기의 불확실성에 대한 최악의 대응은 '잘못된 행동'(Bad action)이 아니라 '행동 안 하는 것'(Inaction)이다"라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경고는 좌고우면의 소극적 자세를 떨쳐내라는 경구(警句)다.




조선일보 201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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