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21세기에도 미국이 전 세계 지배”

작성자
뉴스메이커
작성일
2007-10-18 00:0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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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21세기에도 미국이 전 세계 지배”

2007 10/23 뉴스메이커 746호


프랑스 석학 기 소르망 서울 특별강연서 ‘그 이유’로 9가지 꼽아

우리에게 ‘최소국가’ ‘신국부론’ ‘자본주의 종말과 새로운 세기’ 등 저서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석학이며 칼럼니스트인 기 소르망(Guy Sorman)이 10월 4일 세계경제연구원(이사장 사공일)의 초청으로 방한해 특별 강연을 했다. 기 소르망은 서울 소공동의 웨스틴 조선 호텔에서 ‘왜 21세기에도 미국의 세기가 될 것인가’를 주제로 강연했다. 경제학자·사회학자·문명비평가 등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소르망은 영어로 한 강연을 통해 세계경제를 보는 깊은 시각을 드러냈다. 소르망은 아홉 가지 이유를 들어 “미국이 21세기에도 지구상 주도적인 국가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공일 이사장은 레스터 서로가 ‘유럽이 21세기를 소유할 것인가’라는 책을 낸 바 있다면서 소르망의 강연은 이와 비교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소르망은 “미국이 한동안 세계의 지배적인 자리를 유지할 것이며, 이런 주도적 지위는 급작스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가 든 9개의 이유를 살펴보자.


유럽에 비해 국민복지 부담 적어

첫째, 미국은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가 말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가 항시 진행되는 국가라는 점이다. 미국인들은 회사가 잘 되지 않으면 그것을 차라리 ‘파괴’해버리고 새 회사를 차린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소르망은 “유럽인들은 이런 측면에서 미국인에게 뒤진다”고 지적했다. 유럽인들은 비틀거리는 회사에 지원금을 주면서 계속 끌고 가려는 경향과는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파산법(bankruptcy law)을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고 한다. 유럽과 비교할 때 미국에서는 기업의 설립도 쉽고, 기업의 정리도 쉽다는 말이다. 미국인들이 파산을 실패로 생각하지 않는 문화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경제의 힘은 정치와 경제가 잘 분업한 데서 나온다. 경제적 문제를 결정하는 데 정치의 논리가 끼어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소르망은 “경제의 비정치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에서 경제 부문의 독립성이 보장된 좋은 사례가 바로 중앙은행(Federal Reserve Board)이라는 것이다. 미국에는 경제장관이 따로 없으며, 따라서 정치가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셋째, 미국은 유럽에 비해 복지정책을 위한 국민 세금의 부담이 별로 없는 국가라는 점이다. 소르망은 미국의 세금 부담률은 1950년대처럼 GDP(국내총생산)의 25% 이내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국가 재정을 볼 때 국방비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줄고, 복지 예산이 상대적으로 늘고 있다고 한다. ‘베이비부머(babyboomers)’가 퇴직할 때가 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재정의 복지 부담은 낮은 편이라는 것이다. 넷째, 미국의 노동시장은 신축성이 좋다. 미국의 노동력 시장에서 공급은 거의 무제한이다. 매년 수백만 명의 외국 노동자가 미국에 합법 또는 불법적 방법으로 유입하며, 따라서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말이다. 이들에 대한 사회보장 부담도 낮고, 노동에 대한 세금도 낮다. 사양산업으로 알려진 섬유산업이 중국으로 이전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잘 되고 있는 이유는 노동법이 유연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근로자들이 제대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이 20여년 전 쇠퇴한 섬유산업이 미국에 살아 있는 이유라는 것이다. 게다가 일부 산업 영역 외에는 노동쟁의가 거의 없다고 한다.

다섯째, 미국 산업의 에너지 의존도가 낮아지고 있다. 생산성 증대로 에너지 소비의 비율이 감소하고 있다. 원유값이 비싸지지만 이것이 미국의 산업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생산력을 감소시키지 못했다. 미국은 다양한 대체 에너지를 갖고 있다. 환경단체의 반대로 개발하지 않는 에너지도 있으며, 핵 발전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여섯째, 미국의 달러화는 엄청난 장점을 가졌다. 달러는 공급이 많은 데다 저리로 쉽게 빌릴 수 있다. 미국경제는 달러로 역동성을 살릴 수 있다. 게다가 미국 달러는 지불준비 통화의 역할을 한다. 유로화가 확산되고 있지만 역사가 짧아 아직 달러화를 대체할 수 없다. 달러는 여전히 글로벌 통화로 대접받고 있으며, 미국의 경제 성장이 매년 1%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달러화의 장점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한국, 유럽모델 좇으면 고성장 실패”

일곱째, 미국에서 독점의 개념이 한 세대전에 비해 달라졌다. AT&T 사례에서 보듯이 독점을 인정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미국 내 독점은 인정하지 않지만 글로벌 독점은 용인하는 사례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미국이나 유럽의 법정에서 공격받고 있지만 미국 내에서 마이크로소프트를 분리하라는 주장은 없다.

여덟째, 미국 대학이 탁월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그는 “대학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국가경쟁력으로 변한다”면서 “미국의 대학 교육이 비싸지만 대학들은 유능한 교수와 학생들을 전 세계에서 불러모은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이 학자금으로 한 해 5만 달러나 지불하는 것은 교육의 질이 높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미국의 부자들은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으며 이것이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 미국의 고등학교 중에는 질 낮은 학교도 많지만 대학 교육은 혁신 중이라고 한다. 한국이나 프랑스 학생들은 이런 이유로 미국 유학을 간다는 것이다. 아홉째, 소르망은 미국에서 경기순환은 있지만 경기침체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발전이나 금융산업의 변화로 경기순환은 일어나지만 경기침체는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기 소르망은 “많은 사람이 유럽식 체제가 좋다고 하지만 한국의 경우 국민의 세금 부담이 많은 유럽식을 따를 수 있는지, 국민이 높은 세금을 용인할 수 있는지 잘 연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한국이 유럽식 모델을 따른다면 높은 성장을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소르망은 “프랑스의 대학 교육이 무료지만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기자는 지난 4월 파리 5대학의 언론학 박사과정 학생인 박진우 한국언론재단 통신원에게서도 소르망의 발언과 동일한 비평을 들었다).

미국이 새로운 글로벌 경제체제를 도입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기 소르망은 “달러의 변동환율과 WTO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글로벌 경제체제는 미국에 유리하기 때문에 미국이 스스로 새로운 체제를 도입하려 할 가능성은 낮다”고 전망했다. 따라서 현행 글로벌 경제 규칙이 바뀌려면 다른 나라가 힘을 합쳐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경제학자)가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Bad Samaritans)’에서 “선진국들은 WTO, IBRD, IMF 등 국제기구를 통해 그들에게 유리한 자유무역을 개발도상국들에게 ‘강권’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서평 참고. 경향신문 2007년 10월 6일 K1면). 기 소르망은 “강대국이 되려면 대학교육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며 대학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대학의 자유경쟁이야말로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대학이 관료체제에 묶여 있으면 나라가 발전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기 소르망 약력
·출생: 1944년(63세), 프랑스
·학력: 프랑스국립행정학교(ENA, Ecole Normale Administrative) 졸업
·경력: 1995년 프랑스 총리실 정책 수뇌부 격인 전망위원회 위원장
·연구: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베이징 대외무역대학, 모스크바대학

설원태〈경향신문 편집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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